우리 전통음악에 대한 관심과 동편제 소리의 명맥을 잇기 위해 8일 시작된 <구례동편소리축제 2010> 그 두 번째 날 메인무대에서는 반세기동안 숨죽여 온 탄식과 단단하게 맺혀진 노오란 눈물이 서시천을 타고 섬진강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창극 <산수유>는 그렇게 눈물의 지리산, 눈물의 섬진강으로 무대와 객석을 흥건히 적시며 이 가을 구례 산야에 노오란 산수유꽃을 가득 피워냈다.
한때는 금지곡이기도 했던 ‘산동애가’의 사연을 가지고 국내 초연 무대를 펼친 이 작품은 유영대 예술감독, 박성환 작/연출, 이용탁 음악감독, 염경애 작창으로 반공 이데올로기와 냉전체제로 삼엄한 시대 속의 부전네 가족의 비극사를 창극으로 그려낸 작품.
구례군민을 비롯한 이웃지역 주민들 그리고 관광객 2천여명이 자리한 곳에 <국악챔버오케스트라 아홉>의 비장한 서곡이 메인무대에 깔리자 무대는 반 세기전 산동마을로 탈바꿈하여 <산수유> 이야기를 펼쳐나갔다.
비극의 역사 속에 희생된 이들의 소박하고 평범했던 삶은 극의 <1장 장터> 풍경에서뿐이었다.
<2장 산골> 풍경에서부터는 그칠 줄 모르는 전쟁과 전쟁이 부른 또 다른 전쟁의 폐단이 흉흉하게 마을을 휩쓸고 무대 곳곳에서는 총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마을 주민이 밤사이 하나 둘 사라지고 대낮에도 심심찮게 살육이 자행되던 중, 남자라면 노소를 구별 않고 징용대상으로 지목되자 오빠를 대신해 여동생 ‘부전’이 죽음의 징용길을 자청하며 집을 나선다.
꽃다운 나이 열아홉 ‘부전’은 그렇게 산수유꽃 흐드러진 돌담길을 돌아 나서며 ‘산수유 개나리 노오란 꽃그늘 속으로 쑥 캐고 나물 뜯으러 갔다더라’고 전해 달라 한다.
산수유꽃에 맺어둔 설운 정을 풀어내며 ‘부전’이 부르던 노래 ‘산동애가’가 공연의 절정에서 불리워지자 객석에선 훌쩍훌쩍 눈물 훔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서기동 구례군수를 비롯하여 객석에 앉아 눈물을 훔치던 관람객들은 ‘산동애가’라는 비가(悲歌)가 불리어지던 시대의 사람들, 그리고 그 비가(悲歌)를 알 리 없는 그의 후손들이었다.
무대 위 배우들은 실제 역사의 현장과 그 속의 인물들, 즉 ‘부전’을 중심으로 한 그녀의 가족과 마을주민들, 마을의 역사와 당시 시대 속에 사느라 쉼 없이 불끈불끈 끓어오르는 눈물을 훔치기에 바빴다.
객석의 관람객들은 ‘산동애가’ 속의 비운으로 피멍든 상처와 옷섶에 감추어 둔 눈물 자국들과 조우하게 되면서 그 속의 눈물과 탄식들을 토해낼 수밖에 없었다.
나서지 마라, 맞서지 마라. 그저 스치고 지나갈 바람이려니.
저 들판 억새덤불 휘어지고 구부러져도
뿌릴랑 대지를 더 힘껏 그러쥐고 피눈물을 삼키나니
그저 한철 스치고 지나갈 바람이려니...
나서지 마라, 맞서지 마라. 그저 스치고 지나갈 바람이려니
창극 <산수유> 中 일부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어 서로 적과 적으로 맞서야 하는 시대 속에서 그저 살고자, 살아내고자 했던 한 어머니는 그의 아들(정식), 딸(부전)에게 위와 같이 당부하고 당부한다.
그저 한철 스치고 지나갈 바람이려니 저 들판 억새처럼 휘어지고 구부러져 살라고 한다.
그러나 이쪽에서 부는 바람이 저쪽으로 사라질 적까지 낮게 엎드려 바짝 숨 죽이며 살려고 했던 부전의 어머니와 부전도 결국 그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만다.
부전의 어머니 역할을 맡은 원진주양은 “연습하는 내내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내게는 낯설기만 한 먼 과거의 일이었지만 내 어미의 어미, 내 아비의 아비가 부전이었고, 민철이었다. 그들로 환생하여 무대에 서니 그들이 못다 흘린 눈물까지 대신 흘리게 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공연 내내 눈물을 훔치던 초로의 관람객 한 분은 “지리산 골짜기 골짜기 속에 숨겨 둔 이야기와 섬진강 깊은 강바닥과 모래톱에 묻어 둔 눈물과 탄식은 이번 한 번만의 공연으로 그치지는 않을 것 같다”며 “우리의 후손들이 자신들의 뿌리였던 조상들의 삶을 잊지 않고 기억할 수 있도록 이 공연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공연이 끝난 뒤, 객석에선 기립박수가 쏟아졌다.
우연한 여행길에 이번 공연을 관람하게 된 한 여행객은 “인구도 많지 않은 시골마을에서 이런 완성도 높은 공연이 올려지는 것도 놀랍고 그 공연을 보는 관람객들의 반응 또한 문화수준이 높은 세계 다른 나라의 관람객들과 다르지 않았다.
마지막에 기립박수가 나올 때는 정말 감탄을 금치 못했다”며 흥분과 감동을 감추지 못했다.
커튼콜이 이어지자 무대 위엔 노오란 산수유꽃이 만발했다.
객석으로도 노오란 꽃송이들이 점점이 나비처럼 훨훨 날개짓하며 날아들었다.
푸르른 지리산과 섬진강 또한 오늘밤만은 노오랗게 노오랗게 물들어갔다.
이 가을 구례의 밤은 노오란 산수유꽃 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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